"누구든지 먼저 부자가 돼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공산주의 이론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경제문제
《뉴스위크News Week》지 기자인 멜린다 류Melinda Liu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1970년대에 홍콩에서 일했고, 1979년부터 오랫동안 베이징 지국 지국장이었다. 1978년 여름, 홍콩 특파원이었을 때 그는 중국 정부 초청으로 외국 기자들과 함께 홍콩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은 어촌을 방문했다. 선전深圳이라는 곳이었다. 외국 기자들은 아무 말 없이 중국 정부 관리의 설명을 듣기만 했다.
왜 그랬을까? 까닭이 있었다. 그 곳은 총 인구라고 해봐야 겨우 17가구밖에 안 되는 진흙뻘의 어촌이었다. 그런데 정부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곳을 경제특구로 만들 것이며, 앞으로 중국의 경제 발전을 견인하는 전초기지가 될 것입니다."
외국 기자들은 웃지도 않았고 아무 말 없이 그냥 설명을 듣기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반응은 '비판할 가치도 없다'는 반응이다. 비판도 비판의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외국 기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 찢어지게 가난한 진흙뻘의 시골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예측은 할 수 있지만 우리 세상은 상상을 뛰어넘는 일도 많이 벌어진다. 선전이라는 이 어촌이 그랬다. 멜린다 류는 기자답게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지금 이곳은 인구 1,200만 명의 화려한 도시로 변했습니다. 1978년에 이곳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이 엄청난 변화를 공감할 수 없을 겁니다."
하늘을 찌를 듯하는 고층건물로 가득 찬 중심가를 보면 이곳이 옛날에 그 어촌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불과 30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그 작은 어촌을 경제특구로 만들어야 했던 까닭이 무엇일까? 해답은 마오쩌둥 시기의 중화인민공화국 경제사를 살펴봐야만 나올 수 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중국은 중화민국中華民國이 되었고, 군벌들의 할거 시대로 들어섰다. 이 할거 시대를 마감한 것이 장제스蔣介石가 지휘하는 국민당군의 북벌이다. 그래서 1928~1949년을 국민당시대로 부른다. 이 기간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혈투를 벌인 기간이자,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른 기간이기도 하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1937~1945년에 일본이 중국 대륙에 진출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일본인이 평화로웠다고 느꼈던 1928~1937년에 중국인은 사실상 일본과 계속 싸우고 있었다. 그 시절 중국인은 그야말로 안과 밖에서 동시에 싸워야 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당군이 국민당군을 대륙에서 몰아냈다.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피난을 갔고,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남겨둔 채 중국은 공산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이 시점부터 마오쩌둥이 중국 전체를 이끌었다.
마오쩌둥은 뛰어난 시인이면서 역사학자이고, 사상가이자 병법의 대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천재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몽상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천재성은 있으나 몽상가였던 한 지도자의 망상이 결국 나라 전체를 지옥으로 빠뜨린 것이다.
그는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사상투쟁을 부추겼다. 공산주의 사상이 확실한지의 여부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기준이었다. 그 기준에 의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는 풍토를 조장했으며, 그 결과 매일 인민재판이 벌어졌다. 공산주의 사상이 확실하지 않으면 지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었다. 그 결과 중국 농촌의 기존의 경제력을 거의 상실했다. 생각해보라.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얻어내야만 경제적 토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해야 할 사람들이 사상투쟁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경제적 토대가 무너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들 근로의욕도 없고 생산성도 없었다.
그렇다고 도시의 경제력이 유지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도시에서도 사상투쟁은 계속되었다. 기존의 사업가들도 공산주의 사상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에 넘겨졌다. 구타 끝에 죽는 사람도 많았고, 수치심을 못 이긴 수많은 자본가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이렇게 도시에서도 기존의 경제력은 활력을 잃었다.
1952년까지 중국은 이렇게 돌아갔다. 일종의 '사상 청소 기간'이었던 셈이다. 1953~1957년에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실행했고 이것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그 이유는 공산당이 강력한 통제경제를 실행했고, 인민공화국 수립 직전에 중국의 거시경제가 너무 엉망이어서 목표수치를 낮게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농민들을 공산주의 이념에 합당한 '합작사合作社'라는 협동조합 형태롤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순차적으로 실행되었다.
첫 단계는 '호조조互助組'였다. 농촌을 6~7가구로 묶어 농기구와 가축을 공동으로 출자하고 공동으로 노동하는 방식이었다. 이 호조조를 어느 정도 정착시킨 뒤 그것을 조금 더 발전시킨 형태가 '초급합작사初級合作社'였다. 농촌을 30~50가구로 묶어 농기구와 가축을 공동출자하고 공동노동을 하는 생산방식이었다. 각 농가는 토지도 이 합작사에 출자했지만, 헌납한 경지에 대한 권리는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섞여 있는 계약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합작사는 초급형태이다. 이제 공산주의적 요소가 강한 고급 형태로 나가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 1955년부터 중국 정부는 '토지별 배당'을 줄이고 '노동 배당'을 늘리기 시작했다. 이제 기존에 얼마나 많은 땅을 갖고 있었는지에 상관없이 200~300가구를 묶어 같이 노동해서 할당량을 채우고, 합작사에 저축도 한 뒤에 자기 몫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고급합작사高級合作社'이다.
그러나 고급합작사도 자본주의 요소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농민은 자신이 합작사에 헌남한 토지에 대한 법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었고, 개인이 이용할 수 있는 '자류지自留地'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바로 이 '자류지' 개념이다. 사람은 결국 이기적인 동물이다. 공동으로 경작하는 땅보다 자기 땅에서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고급합작사는 자류지가 합작사 전체 토지의 5퍼센트를 넘을 수 없도록 규정했지만, 농민들은 자류지에서 더 열심히 일했다.
도시에서는 기존 노동자와 지식인들을 '단위單位'로 묶었다. 단위라는 말은 한국어와 중국어가 한자는 같지만 뜻이 다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하는데, 중국어에서 단위는 육아와 의료 및 기본적인 사회보장까지 모두 책임지는 직장을 뜻한다.
농민들은 자류지에 주로 곡물보다 몇 배 비싸게 팔 수 있는 채소를 재배했다. 1956년 농촌 수입의 무려 20~30퍼센트가 이 자류지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통계조사가 나왔다. 중국 농민들은 모든 돼지 가운데 83퍼센트를 자류지에서 나오는 채소의 잉여수익으로 사료와 채소 찌꺼기를 구입해서 사육했다.
닭과 오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축은 다시 귀중한 거름을 생산해서 자류지의 과일과 채소 수확량을 더욱 늘려줬다. 1956년과 1957년에 농민들은 1950년대 초반보다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 도시에 사는 공업노동자들은 자류지에서 생산한 돼지와 닭, 오리, 달걀 등을 사먹었다. 전체 생산량은 늘어났고 사람들의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는 공산당 정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정부가 나서서 농촌에 사적 생산을 증가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부자 농업인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 사는 세상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악착같이 잘 잡아서 뭔가 이뤄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중국의 농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악착스런 사람들이 기회를 잡으며 치고 올라와서 부유한 농민계급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계급을 없애자는 것이 공산주의 혁명이었는데, 농촌에서 새로운 부유계급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냥 놔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중국 정부는 대응책을 만들었다. 그것이 '인민공사人民公社'였다.
중국 전역에 있는 합작사 740만 개를 인민공사 2만 6,000개로 통합했다. 인민공사는 모든 농민이 군대식으로 움직이고, 농촌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는 조직이기도 했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조금이나마 갖고 있는 고급합작사를 극복한 진정한 공산주의 농촌조직으로, 자류지도 없고 평균 5,000가구를 묶어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했다. 구성원들 전원이 공공식당에서 무료로 식사하고 공업,농업,상업,학교,군대가 하나인 공산주의 공동체, 이것이 '인민공사'이다.
- '강철 만들기 운동'으로 경제는 더 피폐해지고
그런데 곧 만화책에서난 일어날 법한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대연강철大煉鋼鐵'이라는 사건이다.
1958년 8월에 중공중앙(중국공산당 핵심 세력들)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고, '중국중앙정치국확대회의가 전 당과 전 인민에게 강철 1,070만 톤 생산을 위해 분투할 것을 호소한다'는 회의공보會議公報를 발표했다. 이 공보를 통해 1958년에 철강 생산량을 1957년(535만 톤)의 두 배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목표가 매우 비현실적인 수치라는 것이다. 회의가 있기 전, 중국이 그 해에 생산한 철강은 450만 톤에 불과했다. 이는 앞으로 4개월 이내에 철강 620만 톤을 생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중국 전역에서 '전 인민 강철 만들기' 열기가 퍼질 수밖에 없었다.
1958년 7월 말 시점에 강철을 만드는 노동력은 몇십만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8월 말쯤 몇백만 명으로 불어나더니 9월 말에 5,000만 명으로 늘어났고, 10월 말엔 6,000만 명, 1958년 말에는 무려 9,000만 명이 '강철 만들기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용광로도 늘어났다. 소형 용광로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7월에 3만 개였던 것이 10월 말엔 몇백만 개에 이를 지경이었다. 또 제철용 초탄焦炭이 부족해서 일반 석탄으로 대체했고, 일반 석탄이 부족해지자 나무를 베어 불을 지폈다. 고품질 철광석이 부족해 저품질 철광석으로 대체했고, 저품질 철광석마저 부족해지자 집에서 쓰는 철기그릇까지 다 쏟아부었다.
그 결과 1958년 겨울에 중국은 강철 1,108만 톤과 생철 1,369만 톤을 생산해 목표 초과달성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그처럼 무지막지한 생산운동의 대가는 엄청났다. 강철 1,108만 톤 중에서 800만 톤만 합격품이고 나머지는 불합격이었다. 생철 1,369만 톤 중에선 아무 쓸모 없는 토철土鐵이 무려 416만 톤을 차지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사태는 강철 만들기 운동에 참여한 수천만 명이 별 생각 없이 전국의 숲을 마구 없앴고, 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생태계 파괴가 일어났다. 오늘날 중국 사막화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그들이 '대연강철'이라고 부르는 '무식한' 강철 만들기 운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몽상을 계속 밀고 나간 것이다. 그의 생각이 옳다면 이제 공산주의에 가장 알맞은 인민공사로 전국 농촌을 통합했으니 엄청난 실적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현실에서는 공산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동의욕이 떨어지고 생산량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간부들은 늘 목표치보다 초과달성했다는 보고를 상부에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사상이 부족한 사람으로 찍히고, 그 결과 숙청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민공사로 형태를 바꾸고 난 이후 농촌의 생산량이 2배, 10배, 심지어 수십 배 늘어났다는 놀라운 보고가 중앙정부로 계속 들어왔다. 심지어 공산당 간부들도 '이게 말이 되나?' 하는 의심을 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도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1958~1960년에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 있었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1959~1961년을 '3년 자연재해自然災害'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이 3년 동안 중국에는 큰 자연재해가 없었다. 이 비극의 원인은 인재人災였다.
비극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대연강철 기간 동안 농민들은 농사를 못 지었다. 이제 자류지도 없어졌기 때문에 노동의욕도 모두 떨어졌다. 소출이 급감하고 인민이 굶어죽는다. 노동력이 감소한 만큼 소출은 더욱 줄어든다. 더욱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다. 그런데 간부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목표량을 초과달성했다고 계속 허위보고를 한다.
아무리 허위보고라 해도 실물과 통계균형을 어느 정도 맞춰야 한다. 게다가 허위보고를 하는 만큼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공출량도 눌어난다. 따라서 간부들은 농민들이 먹어야 할 식량까지 모조리 가져가버린다. 그래서 더욱 많은 농민들이 굶어죽는다. 결국 참지 못한 농민들이 인민들이 공사를 탈출했지만 군인들에게 잡혀서 사살되었다. 농촌은 점점 황폐화되고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도시인들의 배급량도 줄어들고 더욱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다.
이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면서 더 큰 악순환이 벌어졌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아버지와 딸, 남동생이 사는 집이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말했다.
"잠깐 나가 있어라."
딸이 밖에 있다가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니 남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솥에 푹 삶은 엄청 큰 고기가 있었고, 옆에는 사골국물로 우려낼 수 있는 뼈들이 쌓여 있었다. 며칠 뒤에 아버지가 다시 솥에 물을 부었다.
"잠깐 이리 오너라."
딸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빠, 저는 먹지 말아 주세요. 저마저 먹으면 누가 아빠 시중을 들겠어요."
자기 자식을 차례로 잡아먹는 아버지 이야기가 돌아다닐 정도의 사회였으니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대약진운동 전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기간에 대략 2,700만~4,5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3년 (1959~1961) 만에 대한민국 정도의 인구가 모두 죽은 것이다.
1961년 5월 3일,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허베이 성의 한 인민공사에서 어느 농민의 고백을 들었다.
"2년 뒤에는 당신도 굶어죽을 겁니다."
이것은 경제파탄 정도가 아니라 국가가 멸망하기 직전이라고 봐야 한다. 결국 1962년 1월 30일 '7,000인 대회七千人大會'에서 마오쩌둥은 자아비판을 했다.
"이 사태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겠소. 중앙이 저지른 잘못은 직접적으로 내게 책임이 있고, 간접적으로도 내게 책임이 있소. 다른 동지들도 책임이 있지만 내게 가장 큰 책임이 있소. 나는 경제를 잘 모르고, 공업도 상업도 잘 모르오. 농업은 조금 알지만 충분히 잘 안다고 말할수 없소. 생산력 방면에서도 내가 아는 건 많지 않소."
마오쩌둥은 진정으로 참회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결국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만일 우리가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정주의 국가나 자본주의 국가로 변할 것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독재가 되고, 파시스트 독재로 변할 거요. 경계해야 합니다. 다들 잘 생각해요."
- 몽상가 마오쩌둥이 저지른 일 수습하기
그 이후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의 권력은 약화되고, 1962년부터 류사오치劉小奇와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천윈陳雲 등 당의 중심세력들이 실물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기본적인 건설투자 항목을 3분의 2 이상 삭제하고, 중공업 생산품 계획지표를 5~20퍼센트로 삭감했다.
1962년 8월에 덩샤오핑은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명예를 최대한 회복해주었는데, 그 수가 무려 600만 명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개혁이 '포산도호包產到戶'였다. 이것은 인민공사라는 간판을 유지하되, 집단생산이 아니라 각 농가가 농업생산을 책임지면서 초과분은 그 농가 소유가 되도록 해주는 제도이다. 덩샤오핑은 이 제도를 찬성하며 그가 즐겨 하는 말을 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1962년부터 중국 경제는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여전히 몽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사상과 완전히 다른 정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개혁파들의 힘을 완전히 눌러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몽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그 최고점에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학생들에게 "모든 요괴가 변한 것牛鬼蛇神을 일소하라!"고 교시했다. 모든 옛날 것들을 다 부숴야 한다고 꼬드겼다. 그리고는 완벽하게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자기의 정적들을 모두 숙청했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모든 문화유산을 최대한 파괴했다. 이처럼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학생이 선생님을 구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동으로 고발하는 풍토가 만들어졌다. 친구끼리 마음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고, 전 인민의 인성이 완전히 파탄나버렸다. 그러니 경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회복되던 거시경제가 완전히 침체기로 빠져버렸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죽었다. 이제 살아남은 지도자들 중에서 누군가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중국을 이끌어야 했다. 덩샤오핑이 그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덩샤오핑은 1977년 7월 제10기 당중앙위원회 제3회 총회十期三中全會에서 당의 실세로 떠올랐다. 1978년 12월의 제 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을 결정했고, 1980년에 이미 늙은 자신을 대신해 개혁개방 실무를 주도할 젊은 인재를 기용했다. 이들이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을 정도로 파탄이 나버린 중국 경제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산당 정권에 위협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선부론先富論'을 내세웠다. 정부에서 밀어줄테니 누구든 상관없이 일단 자유롭게 부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 선부론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 '경제특구'였다. 경제특구라는 아이디어는 현재 국가부주석인 시진핑習近平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勲이 덩샤오핑에서 건의한 것이다.
"지금 중국은 자본이 없으니까 외국자본을 최대한 끌어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외국자본가들에게 많은 혜택과 자유를 주는 특정지역이 필요합니다. 이런 지역을 우선 만드는 게 급합니다."
경제특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처음에 네 곳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홍콩 옆에 붙어 있는 진흙뻘의 어촌, 바로 선전이었다.
출처 : 중국 읽어주는 남자, 박근형 / 명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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